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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야식당

우야 웨이크-업 스토리

WHY NEW YORK?


오랜 전부터 준비했던 것은 아닙니다. 지난 4일, 서울퀴어문화축제에서 열었던 정민우 선생님의 ‘대만, 싱가포르, 한국의 성소수자 축제와 퀴어 정치학’ 강연을 들었습니다. 대만, 싱가포르, 한국의 이야기를 들으며 여러 국가에서 열리고 있는 퀴어문화축제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정치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더 알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뉴욕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갑작스럽게 하게 됐고, 고민 고민 끝에 며칠 전에 ‘뉴욕에 가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가자! 

 

올해는 뉴욕 스톤월 항쟁 50년이 되는 해입니다. 1969년 6월 28일, 미국 뉴욕 ‘스톤월인’ 게이 술집을 단속하던 경찰에 맞서 성소수자들이 집단 저항을 했던 날을 시작으로 퀴어 퍼레이드가 시작됐습니다. 2019년 6월 28일, 저는 50년의 시간을 거슬러 뉴욕에 가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4월 25일-5월 2일 무지개 줄서기(서울지방경찰청, 종로경찰서, 남대문경찰서 집회/행진 신고)를 시작으로, 5월 21일-6월 4일(매주 화요일) 연속강연회, 5월 30일 서울 핑크닷, 6월 1일 서울 퀴어퍼레이드, 6월 5일-6월 9일 19회 한국 퀴어영화제를 끝으로, 20회 서울 퀴어문화축제가 끝났습니다. 한 달 반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10여 년의 시간들을 돌아보게 되었고 새로운 것들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WHAT I'VE DONE


2007년은 저에게 참으로 퀴어한 해였습니다. 레즈비언 라디오 제작단 레주파 활동을 시작했고, 처음으로 퀴어문화축제-퀴어퍼레이드에 참여해서 소속감과 해방감을 동시에 느꼈습니다. 당시 내한 방문했던 헤드윅 주인공인 존 카메론 미첼이 퀴퍼에 깜짝 방문하여 펼친 즉흥공연을 눈앞에서 보고 들으며 성소수자로의 자긍심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 해 10월 마지막 날, ‘성적 지향’이 빠진 차별금지법 제정을 막기 위해 ‘성적 소수자 차별 및 혐오 저지를 위한 긴급 번개’가 열렸습니다. 성소수자차별저지긴급행동에 참여하며 법제도가 삶에 미치는 영향력을 느꼈고, 그때부터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퀴어 퍼레이드를 참가하면서 큰 감동을 받고 저도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 마음을 안고 2009년부터 퀴어문화축제 기획단 활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무대 사회를 보고, 트럭에 올라가고, 파티 진행을 하고, 퀴어 창작자들 지원을 하고, 퀴어 친화적 공간들을 연결하고... 다양한 활동들을 하면서 많은 것들을 배웠습니다. 퀴어문화축제를 준비하고 있는 기획단들의 열정과 에너지와 참여하는 사람들의 벅찬 감정과 내딛는 발걸음을 보면서 퀴어문화축제라는 열린 장의 소중함을 느껶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퀴어 문화의 장들이 생기길 바라면서 게이 코러스 ‘지보이스’에서 여성 객원, 스태프로 참여하고, 레인보우 페미니스트 비혼 여성 코러스 ‘아는언니들’ 활동을 했습니다. 

 

그 경험들을 갖고,  

- 하레와 우야(2013-17, 레즈비언 갱스터 랩 듀오)

- 뻘퀴소(2014-16, 퀴어퍼레이드 혼자 가기 뻘쭘한 퀴어를 소개합니다 행사)

- 숨은퀴어찾기 (2015, 서울시청을 잼으로 물들이다 with 퀴잼) 

- 호모책읽기 (2015, 공공도서관에 퀴어 관련 도서 신청하기 with 퀴잼) 

- 나는 나다(2016, 성평등 소리 그림책 제작 교육 with 꼬막)  

- 당신은 두 곳 사이에서 고민해 본 적 있나요? (2016-17, 성중립 화장실 캠페인 with 꼬막) 

- 우야식당(2015-~, 당신만을 위한 단 하나의 식탁) 

등의 다양한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I LIVE IN MAPO, SEOUL


2013년에는 마포 홍대에서 퀴어문화축제가 열렸습니다. '더 퀴어Queer, 우리가 있다’는 슬로건을 가지고 처음으로 생활권으로 들어간 축제였고, 성소수자들이 바로 ‘우리 이웃’이며 함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축제가 이루어진 건 성소수자 유권자들이 지방선거를 준비하며 2010년에 생겨난 마포레인보우유권자연대(마포레인보우주민연대)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홍대 걷고싶은거리 상인연합회의 노력이 컸습니다. 홍대 걷고싶은거리 상인회장님이 “지금의 홍대 거리를 만든 게 문화·예술·개방성인데, 홍대는 성소수자든 누구든 품는 곳이어야 한다. 있을 때 잘해야 한다”며 상인분들을 설득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홍대 거리가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문화적 편견을 버려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이고 상점들에는 무지개 깃발들이 달렸습니다. 

 

마포에는 2005년부터 레주파(레즈비언 주파수/ 퀴어 여성 라디오 방송 제작단)가 만들고 있는, L양장점이 송출되고 있는 마포공동체라디오가 있고, 레즈비언 바(bar)와 클럽 그리고 성소수자 단체들이 밀집되어 있습니다. 살고 있는 동네에서, 동네 사람들이 함께 만든 퀴어문화축제가 열리는 것을 보며, 마포구 주민, 유권자, 성소수자 등의 다양한 정체성을 느끼고 지역사회 공동체의 안전함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마포를 떠날 수 없고, 마포에서 계속 살아가고자 합니다.

 

2014년에는 190명의 서울시민 인권헌장 제정 시민위원들이 합의한 서울시인권헌장 선포가 무산됐습니다. 성소수자 차별 반대와 서울시민 인권헌장 제정을 요구하며 서울시청 로비를 점거한 “무지개 농성단"에 참여했습니다. 그 이후로 온전한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서울을 꿈꾸며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서울 청년정책네트워크에서 기타 분과 안에서 성소수자 분과를 신설하여 활동했고, 2015년에 열린 제1회 서울 청년의회에서 성소수자 분과는 성별을 기입하지 않아도 되는 표준이력서 도입에 관해 정책제안을 했습니다. 

 

 

WORLD IN MY HANDS 🇯🇵🇹🇼🇭🇰...🇺🇸!


그리고 그해 처음으로 해외 프라이드 퍼레이드를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도쿄 레인보우 프라이드에 갔을 때, 무대 행사 중에 레즈비언 커플의 공개 결혼식이 열렸습니다. 그 당시 시부야구(區)에서 ‘동반자 관계 증명서’ 발급 조례안이 통과됐고, 공개 결혼식의 축사를 前 시부야구(區) 장이 맡았습니다. 축사 중에 “기존 법들은 LGBT의 존재를 모른 채 제정된 법이다. 법 앞의 평등을 이야기할 때, 법이 바뀌지 않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는 말을 듣고 결심했습니다. ‘이전 세대’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시스템을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바꿔내는 일들을 하면서 살아가겠다고. 

 

대만에 갔을 때는 LGBT 프라이드와 함께 아시아 성소수자 합창 페스티벌 'HAND IN HAND'가 열렸습니다. '지보이스'와 '아는언니들'이 무대에 올라가 목소리를 냈고, 음악이 주는 힘과 연대를 느꼈습니다. 한국 안에서의 연대도 중요하지만, 다른 나라들과의 연대도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한 국가가 가지고 있는 문화와 인식에 따라 퀴어문화축제의 분위기도 사람들의 반응도 다름을 보면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고, 사회 인식을 개선하는 활동들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2016년부터 다양한 정체성을 모두 잃지 않고 온전한 나로 살아가기 위해 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 활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1인 가구의 건강한 식생활에 관심을 두고 자기돌봄과 다양한 관계맺음을 고민하며, 한 사람의 삶을 국가에서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 묻고 그 답을 찾아나갔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내 문제만 해결돼야 세상이 바뀌는 게 아니고, 각자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이 전반적으로 해결돼야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서로의 문제를 마주하고 함께 해결하길 바라며 2017년부터 올 초까지 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 운영위원장을 맡아 다양한 청년들이 모이는 '청년참여 플랫폼'부터 안전한 공간으로 만들어나갔습니다. 

 

그리고 '정해진' 것들에 물음을 갖고, '정해진' 것들을 깨나가는 활동들을 했습니다. 기존의 시스템이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삶을, 다음 세대의 삶을 포괄하지 못하는 부분을 절감했습니다. 그래서 '온전한 나 자신'으로 살기 위해 시스템의 근본적 변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사회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정책을 만들어가는 과정 속에서  '성소수자로만은 있지 말자, 하지만 성소수자 정체성은 잃지 말자'고 다짐하며 한국 사회에서 무엇을 해나갈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무거운 고민을 혼자 부둥켜 안고 있다가 작년 홍콩 프라이드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아시아 활동가들과 식사하는 자리에서 대만 활동가들을 만났고, 대만에서 동성 결혼권 찬반 국민투표를 실시할 예정인데 상황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에 대만의 국민투표 결과 결혼을 앞으로도 남녀'로 제한하자는 반대표가 더 많이 나왔다는 소식을 기사로 접했습니다. 한국퀴어영화제에서 '아일랜드 수정헌법 34조 (The 34th)'를 보고, 동성혼 법제화와 생활동반자법 제정 등을 열망하고 있었기에, 너무나도 슬픈 소식에 한국사회에서는 제도적으로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지 더욱더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그런데 올해 아이다호 데이에 대만에서 동성 간 결혼이 아시아 최초로 법제화됐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반갑고 기쁜 소식에, '나는 무엇을 해야할까?'의 질문이, '우선 무엇이든 해보자!'로 바뀌었습니다. 

 

며칠 전, 50년 만에 뉴욕경찰(제임스 오닐 뉴욕 경찰국장)이 '스톤월인' 급습을 언급하면서,'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다. 당시 뉴욕 경찰의 행동은 명백히 잘못됐다'라고 공식적으로 사과했다고 합니다. 이 소식도 올해 뉴욕에 가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 중 하나입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뉴욕 프라이드 퍼레이드를 경험하며, 한국에서 어떤 활동을 해나가면 좋을지 새로운 도전과제 찾고, 무엇이든 시도할 수 있는 힘을 얻어가지고 오려고 합니다. 

 

여러분, 저에게 일탈의 기회를,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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